돌계단을 따라 발을 디디면, 시간이 느려진다. 바람은 나뭇잎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들고, 나무 그림자가 오래된 담장을 쓰다듬는다. 소쇄원. 이름부터가 ‘맑고 깨끗하며 비워낸 뜰’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. 그 의미는, 이 스케치 속 선과 점의 배열에서도 그대로 전해진다.
자연과 집, 길과 계단, 나무와 담장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엮여 있는 이 장면은 단순한 정원 풍경을 넘어서 한 철학을 담고 있다. 인위는 자연을 따라 물러서고, 자연은 인위 위로 부드럽게 덮인다. 사람은 그 경계에서 잠시 앉아 쉰다.
저 너머의 작은 집채는 겸손한 자세로 앉아 있다. 웅장함보다 정갈함을 택한 지붕선은 낮게 엎드려 보는 이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. 높지 않은 담장과 휘어진 길은 닫히지 않은 소통을 말하고, 그 위로 덮인 나뭇가지들은 마치 손을 내미는 듯 다정하다.
소쇄원은 자연을 닮으려 하지 않았다. 그저 자연에 기대어 스스로를 지운다. 그 지워진 자리에 바람이 흐르고, 새소리가 머무른다.
이 정원을 그린 작가의 시선도 그런 듯하다. 화려한 수사는 없다. 대신 조용히 바라본다. 담백한 선 하나하나에 담긴 사유는 보는 이의 마음에 여운을 남긴다. 마치 이곳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이가 남긴 발자국처럼.